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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History2009.03.28 02:49

사형 집행인의 노래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에서 점퍼가, 런던탑 1

기사입력 2009-03-27 오후 3:32:15

 

 

오늘 밤 제 신경이 이상해요. 정말 그래요, 가지 말아요
애기를 들려주세요. 왜 안하죠. 하세요
뭘 생각하세요? 무슨 생각? 무슨?
당신이 뭘 생각하는지 통 알 수 없어요. 생각해봐요

-나는 우리가 죽은 자들이 자기 뼈를 잃은 쥐들의 골목에 있다고 생각해

(엘리엇 -<황무지> 중에서)


 

▲앤 불린의 초상화.

1536년 5월 19일 금요일 9시. 5월의 아침 햇살은 포근했다. 앤 불린은 타워 그린으로 걸어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하기 전에는 처형 신호를 내리지 말라고 당부하고 침착하고 당당한 목소리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선하신 하느님의 백성들이여, 전 오늘 법에 따라 죽으러 나왔습니다. 그에 반대하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죽으러 나왔으니 겸허하게 나의 신이신 왕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살면서 왕에게 거스른 적이 있다면 죽음으로써 확실히 속죄하게 되길 바랍니다. 선량한 그대들에게 바라노니 부디 내 왕이시며 그대들의 왕이신 왕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오늘 기꺼이 죽음을 맞으며 세상 사람들에게 겸허히 용서를 구하고자 합니다. 세상을 떠나려는 절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연설을 마친 그녀는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을 따라온 충실한 네 명의 시녀들에게 자신이 죽는 모습을 보고 놀라거나 슬퍼하지 말라. 못되게 굴었다면 부디 용서해 달라. 왕비로 살아온 자신을 결코 잊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기도할 때면 늘 절 기억하세요. 매일같이 희망의 빛이 비추길. 앤'이라고 서명한 기도서를 시녀에게 유품으로 건네주었다. 그녀는 마침내 후드를 벗었다. 프랑스에서 날아온 솜씨 좋은 사형 집행인은 무릎을 꿇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죽음 앞의 예의였다 .앤은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목걸이를 풀고는 단두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시녀중 하나가 눈가리개를 해줬다. 앤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말을 큰 소리로 외쳤다."주여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 주여 제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여 제 영혼을 바치나이다"

훗날 런던탑의 사형 집행인들은 도끼날을 갈면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

"앤 왕비는 자신의 하얀 목을 참수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일격이 가해지기를 기다렸다
칼날은 그녀의 목을 정확히 두 동강으로 잘라놓았고 너무나 삽시간이라 그녀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윙 윙 윙 윙

솔즈베리 백작부인은 귀부인들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품위 있는 모습으로 죽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도끼를 들어 올려 그녀의 두개골을 두 조각냈다
바로 그때 도끼날의 이가 빠져 무너져 버렸다
윙 윙 윙 윙

캐서린 왕비는 조금이라도 쉽게 죽게 해달라고 나에게 금으로 된 사슬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준 값비싼 뇌물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는 내가 내리치자마자 멀리 날아갔기 때문에
윙 윙 윙 윙"


(나스메 소세끼가 옮긴 엔즈워드의 <지옥문> 중에서)

▲영국의 사형집행인들이 사형수의 목을 칠 때 썼던 도끼.

666이란 숫자를 이마에 달고 나온 악마의 아기 오멘이나 피를 뿌리는 캐리 말고 내가 어려서 무서워하면서도 진지하게 자꾸 생각해본 이야기로는 목에 이어 붙은 접합선이 있는 몸으로 런던의 밤거리를 눈물 흘리며 다니는 괴물 프랑켄슈타인과 온몸과 얼굴을 철갑옷으로 가리고 있어 아무도 그의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어떤 왕의 사생아란 소문이 돌았다는 바스티유 감옥의 철가면, 그리고 '너는 내 칼 때문에 죽는게 아니라 네 과거 때문에 죽는다'라고 외치며 복수하는 몽테크리스토 백작, 런던탑 블러디 타워의 창문에 얼굴을 한번 비친 뒤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소년 왕 이야기, 천일의 앤 블린 이야기 등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그런 이야기에 깊이 빠져 들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입술이 하얗게 말라가자 엄마는 처방전으로 직접 공포스러우나 알고 보면 썰렁한 이야기를 창조하는 가내 동화 작가로 나서기에 이르렀는데 이를테면 철가면은 알고 보니 중국집 배달 소년이었다는 수준의 이야기였고 그걸 계기로 나는 내가 읽은 것을 엄마에게 다 늘어놓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어느날 파스칼은 "그림은 얼마나 공허한가! 실물을 보고는 전혀 감탄하지 않는데 실물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란 얼마나 공허한가!"라고 외쳤다는데 나는 그 문장을 보자 어린 시절에 내가 무서운 이야기에 왜 그렇게 빠져 들었었나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고요하고 평화로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만 보이는 시골 마을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탐정물과 공포물, 야만스런 역사에 빠져들던 소녀에게 필요했던 것이 바로 파스칼의 그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세상을 보러 길을 나서 보지 못한, 세상을 보고 어리둥절한 채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 지 모르는 나는 그런 상상들을 통해 세상은 수많은 이야기라는 것, 세계 전체는 누구에게나 어느 순간 고유하고 개인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 그런데도 역사에는 '전형적인 것, 되풀이 되는 것. 항상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어떤 사실 자체 보다 어떤 사실에 대한 나의 생각을 갖는 것이 필요한 순간이 있으리란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 것 같다. 그런 많은 밤에 개구리 울고 귀뚜라미 울고 밤길은 어둡고 현관불은 흐릿하고 하루살이는 불빛에 날아들고 나방은 그 불빛에 빠지직 타죽고 개는 달을 보고 짖고 배추에 서리 내리고,동치미는 땅 속에서 살얼음을 띄우고…그런 밤엔 무서운 이야기가 제격이었다.

21세기가 아니고 20세기에 런던을 찾은 일본 근대소설의 거장 나스메 소세끼는 어느날 런던탑을 보고는 이런 글을 썼다.

"런던탑의 역사는 영국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고갱이다. 과거라는 괴이한 물체를 뒤덮는 장막이 저절로 찢겨 희미한 광채를 20세기에 반사시키고 있는 것이 런던탑이다. 모든 것을 없애버린 시간의 흐름이 거슬러 올라간 마지막 지점에서 고대의 한 조각이 현대로 떠내려 온 게 런던탑이다. 사람의 피, 사람의 살, 사람의 죄가 모여 말, 차, 기차 속에 결정으로 남아있는 것이 런던탑이다. 런던 브리지 위에서 템스강을 사이에 두고 탑을 바라볼 때 나는 내가 현대인인지 아니면 고대인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잊고 그 위용에 빠져 있었다. 런던탑은 20세기를 경멸하듯 서 있다. 나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 전 세기의 음울한 일들을 영원히 전하겠다고 맹세한 듯.. "

(<런던탑> 중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런던탑은 전세기의 음울한 일을 영원히 전하는 곳이 되었을까? 왜 사람들은 런던탑에서 괴이한 이야기를 수집하게 되었을까?

▲ 런던탑의 전경.


사실 런던탑은 역사적 의미가 많은 곳이다. 원래 런던탑은 런던이란 도시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려주는 곳이었다. 프랑스산 흰색 캉 석재로 지은 전망 좋은 화이트 타워는 당시 가장 높은 건물로 런던을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성벽의 두께는 4,5미터로 런던탑은 항구를 수비하는 튼튼한 요새이자 왕궁이었단 걸 알 수 있다.

런던탑은 영국 초기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사건중 하나인 노르만 정복의 영원한 상징이었다. 21년 동안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를 소유하고 있던 정복왕 윌리엄은 아들을 셋 두었다. 윌리엄은 유산으로 맏아들에겐 노르망디를 줬다.(그는 맏아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이런 왕을 모시는 노르망디 사람들은 불행할 것이라 했다) 가장 좋아했던 둘째 아들에게는 잉글랜드를 물려주었다. 세째 아들 헨리에겐 물려줄 땅이 없어 현금을 주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십자군 전쟁에 나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둘째에게 노르망디를 저당 잡혔다. 그리고 둘째는 사냥터에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의 심장을 꿰뚫은 화살이 고의적이었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미스터리다. 그러자 셋째는 재빨리 웨스트 민스터 사원으로 달려가 왕관을 썼다. 얼마 뒤 십자군에서 돌아온 큰 아들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잉글랜드를 침략했지만 후퇴하고 그냥 노르망디에 머물게 되었다. 노르망디에서 그는 무능한 정치인이어서 그에게 질린 봉신들은 헨리에게 제발 노르망디를 침략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헨리 1세가 다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통치하게 되었다. 헨리 1세의 통치는 훌륭해서 후세 사람들은 왕은 정직했고 위엄이 대단한 사람으로 그의 처세엔 아무도 부정을 행하지 않았다, 인간과 가축이 다 함께 평화로웠고 금은보화를 가지고 다녀도 아무런 피해가 생기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헨리 1세에게 불행한 사건이 생긴다. 그의 후계자인 왕태자가 노르망디에서 돌아오는 길에 술 취한 키잡이의 실수로 물에 빠져 죽은 것이다. 헨리 1세 사후 왕위를 둘러싼 내전이 19년간이나 벌어져 이때처럼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에 귀의한 시절은 없었을 거라고 한다. 런던에도 많은 교회가 생겼다. (이때 등장한 유명한 추리소설의 주인공이 캐드펠 수사다)

1154년 마침내 왕이 된 이는 헨리 1세 누나의 아들이었다. 그가 헨리 2세다. 헨리 2세의 가문은 좀 이상한 내력으로 유명했다. 그의 할머니 중 한사람은 마녀라고 불렸는데 어느 날 성당 창문을 열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가문 사람들은 재능은 있어도 악마에서 태어나 악마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었다. 헨리 2세는 프랑스의 루이 7세를 방문했다가 왕비 엘리노어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왕이 아니라 신부와 결혼한 것 같다고 평소에 푸념하던 여장부였던 엘리노어는 즉각 이혼하고 황소처럼 힘 좋고 혈기왕성한 헨리 2세와 결혼을 하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는 29세. 왕의 나이는 19세였다. 그녀는 혼수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프랑스 땅을 가져와 그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궁정은 당시 세계에서 제일 활기찬 곳이었고 그는 평생 통치를 위해 여행을 가장 많이 한 왕으로 기록되었는데 그의 순회 왕실 법정은 공정함과 현명함으로 유명했고 결과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는 동일한 법률, 관습법을 탄생시켰다.

▲ 페어 로자문디와 엘리노어 왕비의 이야기를 다룬 그림. 에블린 모간의 작품.

내가 그의 통치 시절에 관심을 갖게 것은 <죽음의 미로>란 소설 때문이었는데 헨리 2세는 사랑하는 여인, 세상의 장미란 뜻의 로자문디를 사냥터 근처의 외딴 성-기독교 세계의 가장 견고한 정조대였다는 성-에 숨겨놓고 사랑을 나눈다. 그런데 어느날 로자문디가 독살을 당한다. 누가? 왜 그녀를 죽였을까를 정확히 밝혀내지 못하면 영국은 끔찍한 내전에 휘말리게 될 상황이었는데 소설 속에선 이탈리아에서 공부한 여자 검시관이 등장해 그녀의 사인을 밝혀낸다. 그 때 로자문디의 독살자로 의심받았던 이가 바로 엘리노어 왕비이고 실제로 역사 속에서도 그녀는 남편을 배신했다. 수도사들은 암살당한 왕의 여자, 소문만큼 아름답지 않고 뚱보였던 페어 로자문디를 위해 그녀의 묘비에 이런 문구를 새겨놓았다. 여기 영면하고 있는 사람은/ 세계의 장미이지/ 아름다운 장미는 아니다

헨리 2세의 네 아들들 중 위로 둘은 일찍 죽었고 어머니 엘리노어와 더 가까웠던 셋째 아들은 프랑스의 왕 필립 오귀스트 (루브르에 가면 지하에서 그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와 결탁해 자기 아버지를 배신할 궁리를 했기 때문에 헨리 2세는 막내아들 존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반역자 명단의 첫 자리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기탁했던 아들 존의 이름을 발견한 그는 혼수상태에 빠져 다시 깨어나지 못하고 34년간의 통치를 끝내게 되었다. 그가 죽었을 때 누군가는 '역시 그의 가문은 악마에게 태어나 악마에게로 돌아가는군!'하고 수군댔을지도 모르겠다.

그를 배신한 셋째 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사자왕 리처드이다. 그의 인생의 가장 유명한 일화는 프랑스 왕 필립 오귀스트도 함께한 십자군 참가다. 기사도 이야기에 푹 빠져 낭만적 열광이 도에 넘치게 흘러 넘쳤던 리처드는 왕이 되자마자 국고를 탕진하고 심지어 지방 관직까지 팔아 돈을 마련해 성지를 향한 배에 올라탄다. 그는 십자군 전쟁동안 사라센 포로 학살을 저질렀는데 그것 때문에 사라센 아이들은 저기 사자왕 리처드가 온다 하면 울음을 뚝 그쳤다고 한다. 결국 그는 위대한 술탄 살라딘과 조약을 맺고 귀국하는데 그 길에 신성 로마 제국의 포로가 되었다가 간수들과 술을 마시며 우울을 달래고 엄청난 몸값을 내고 풀려난다. 그는 화살에 맞아 군대 막사에서 사망하는데 그에 대한 평가는 이랬다. '나쁜 자식, 나쁜 형제, 나쁜 남편, 나쁜 국왕.'

그러나 그에게는 위대한 사자왕 리처드라는 전설이 변함없이 따라 다닌다. 리처드왕이 중세 흑기사의 상징처럼 여겨진 것은 스코틀랜드의 역사가 월터 스콧의 역할이 클 것 같다. 월터 스콧은 <아이반호>란 소설에서 사자왕 리처드와 로빈 후드를 멋지게 그려내는데 나는 월터 스콧의 아이반호의 '숲 속의 아름답고 푸른 빈터들 중 하나에 석양의 마지막 햇살이 비쳐 들었다. 둥치가 굵고 우듬지가 널따랗게 퍼져 무성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떡갈나무들, 아마도 로마 병정들의 보무당당한 행진을 지켜보았을 나무들 수백 그루가 가지를 뻗치고 있는 아래 부드러운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같은 문장의 애호가였다. 왕비의 이름을 걸고 벌어지던 화살 시합이나 마창 시합이 벌어지는 막사와 장막, 평민과 귀족과 수도사와 사제가 엉켜서 한바탕 즐기고 싸우는 풍경은 나에게는 월터 스콧이 문학이란 이름으로 보여준 역사였다. 로빈 후드는 너무도 다양한 버전이 있다는데 내가 읽은 소설 로빈 후드에서는, 로빈후드는 셔우드 숲에서 색슨족 농민을 괴롭히는 남작과 수도원장을 물리치고 위기에 빠진 미인 메리언을 구출해 결혼을 한다.

▲ 사자왕 리처드의 초상화

그 때 바람을 가르고 홀연히 등장해 천하 장사같은 힘과 용기와 신중함으로 로빈 후드를 도와주고 살인죄를 사면까지 해주는 아름다운 푸른 눈의 흑기사가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사자왕 리처드였던 것이다. 사자왕 리처드가 '나에게는 나만의 할 일이 있다!'라고 말한 뒤 프랑스의 골치 덩어리를 처치하러 다시 말을 달려 홀로 평원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내 어린 마음에도 다시 못 볼 장관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그의 말 타는 솜씨는 너무 훌륭하고 너무 빨라서 아무도 그를 따라갈 엄두조차 내지 못해서 결국 그는 그의 길을 혼자가야만 했으니까. 로빈 후드는 당시 현실의 모순을 모두 형인 리처드가 십자군으로 나간 틈을 타서 못되고 못난 동생 존이 마음대로 국정을 처리해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빈 후드가 마지막에 죽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좋다. 그는 평생 몸에 지니고 있던 화살 한방을 마지막으로 날린 다음에 이제 내 인생의 마지막 화살도 날렸으니 저기 화살이 떨어진 곳에 나를 묻어달라고 친구에게 부탁하고 숨을 거둔다. 도적이자 무법자인 동시에 여자와 자유와 정의를 사랑했던 그는 자유란 것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 얻는 구체적인 것이란 걸 알려주었던 셈이고 영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로빈후드를 민중의 영웅으로, 우리가 홍길동이나 임꺽정, 장길산을 사랑하듯 사랑했던 것 같다.이런 영웅들은 분명히 자의적인 법집행 같은 통치의 불합리한 모순이 명백하게 존재하는 시대에 민중들이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초인이었을 것이다.(헨리 8세는 가면극을 할 때 로빈후드 역할을 하길 좋아했다. 캐서린 왕비 앞에서 로빈 후드 가면을 벗고 깜짝 놀래주기를 하도 여러 차례 해서 왕비는 다 아는데도 번번이 놀라는 척해줬다고 한다)

그런데 반대로 술탄 살라딘 쪽의 기록에 따르면 사자왕 리처드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따라 다닌다. '사자왕 리처드는 실제로 전쟁터에서 사자처럼 거칠게 싸우는데 사자가 알라의 피조물 중에서 가장 교양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 않는가? 우리는 이 왕을 사자 똥구멍 왕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건 진지한 이야기다. 왜냐하면. 실제로 죽은 사자 항문을 여러 번 보았는데 볼 때마다 그 크기에 엄청 놀라니까.' 술탄 살라딘은 리처드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사랑하는 조카를 잃고 애닮은 시 한 수를 썼는데 간략하게 기억나는 대로만 옮겨 적어보면 이렇다. '얼마나 많은 수가 더 죽을 것인가? 피리 소리나 우리가 만드는 노래로 그들을 다시 불러올 수는 없지만 / 매일 아침 동이 틀 때 / 나는 내 기도로 그들을 기억하리라/…어둠이 지배한다 / 외로움이 지배한다 / 우리가 다시 길을 밝힐 수 있을까?

▲술탄 살라딘을 그린 그림.

술탄 살라딘은 아들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너한테 티그리스 강에서 나일강에 이르는 제국을 넘겨주게 되었다. 우리의 승리는 백성이 우리를 지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라. 백성으로부터 고립되면 절대 오래갈 수 없다. 술탄은 건강이 쇠약해져 순례를 떠나지 못하게 되자 아쉬워하면서 대신 성벽 밖에서 메카로부터 돌아오는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싶어 했고 그 날 맞은 비로 고열에 시달리다 죽는다. 그 마지막 순례자를 만나던 비 오는 날에 옆에 있던 신하가 망토를 벗어 어깨에 둘러주자 술탄은 웃으면서 그 옷을 다시 신하에게 던져주는데 그 이유는 신하가 평소에 늘 약골이었던 것을 기억해서였다. 나는 살라딘 이야기를 읽은 뒤에 다마스커스의 비 내리는 전경을 찍은 흑백 사진을 본 일이 있는데 그 사진은 살라딘이 죽자 온 다마스커스 사람들이 눈물을 주룩주룩 쏟으며 '알라여, 천국의 문을 열고 이 영혼을 받아들여 그가 늘 바라던 최후의 승리를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던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이후 역사에서 다마스커스가 겪은 불행을 생각하자 뭉클했다. 아랍인들은 아직도 또 다른 살라딘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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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잠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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